그레이 노트

K에게

grey809 2023. 1. 5. 23:35

오늘따라 아들이 늦게까지 독서를 하는군요. 그 옆에 앉아 나는 이 편지를 씁니다. 어젯밤엔 이상한 꿈을 꾸었더랬습니다. 너무 선명해서 이상한 꿈.

- 갤러리에서 그녀는 날 알아 보았으나, 모른 체 하고서는 나와 함께 동행한 지인에게 자신의 독일인 약혼자를 소개했다. 아는 체 못하고서 난 그녀의 다 큰 아들을 떠올렸다. 이혼했구나. 그녀는 곧 독일로 가겠구나. 벤쿠버에서의 성공을 너머 유럽으로 진출하다니 넌 특출난 예술가임을 부정할 수 없구나.
갤러리 근처 식장서 누군가가 결혼식을 망쳤고, 사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가꾼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서 나와 나는 카페, 파도치는 바다, 살았던 듯 익숙하지만 허름한 동네, 좀 더 걸어가 신도시를 지나쳐 갔다.

K. 달라진 거라면 꿈입니다. 전 한동안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한 이년여. 그러다 다시 매일 밤 꿈 퍼레이드. 바쁜 엄마는 한 번도 오질 않아 야속하기만 합니다.

- 엄마 제발 꿈에라도 나와. 제발.. 제발이야... 제발 말해줘. 사랑한다고. 보고싶다고. 다시 만날거라고.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줘..

싸동여 매기 바쁘고, 느리나 급하고, 그러다 맘에 안들면 신경질적으로 다 끝마쳐야 하고, 합리적 기준이 아닌 지극히 비논리적인 잣대로 완벽하다 생각할 때까지 치워야 하고 해내야 하고. 모든 상황이 조종 가능한 범위 내에 있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은 정서는 질병에 속한다는 걸 이제서야 알기에 많이 내려 놓으려 합니다만.. 실은 자포자기에 가깝습니다. 무뇌처럼. 그래야 억지같은 이 인생이 연장됨에 순응할테니까요.

나의 유년기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유년의 네 식구. 아빠. 엄마. 네 살 터울의 남동생과 나.
지극히 주관적인 완벽함. 그 완전함이 저녁 파도처럼 산산이 부서져 버렸습니다.

유년의 그 기와집을 되찾고 싶습니다. 그 감나무 마당을 되찾아야겠습니다. 엄마를 되찾아야겠습니다. 엄마는 엄마니까 당연히 어딜 가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엄만 계실거예요. 어디에도 가실 분이 아닙니다.

- 엄마. 오늘 밤엔 우리 그 바다카페서 만나. 가지말고. 나랑 있어. 제발. 부탁이야. 엄마. 엄마...

- 바보. 바보. 바보 멍청이 천치. 빙충. 식충. 먹통. 해삼. 말미잘...

K. 더이상은 못하겠습니다. 오늘은 그만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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