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노트

나의 해방일지 - 노동, 식구, 사랑, 이름.

grey809 2022. 5. 27. 10:37

Picture by 해방클럽

 

산포에서..

아버지는 질문 대신 침묵으로,

노동의 시간으로 구씨를 인정해 주었고.

 

어머니는 손수 갓 지은 밥과 반찬으로,

따뜻한 말 한마디와 미소로 대접했다.

 

기정이는 거짓 없이 꾸밈없이 대함으로

오히려 구씨의 존재를 존중했고.

창희는 가랑비처럼 소소하게 구씨를 남자로, 형으로 대하였다.

 

미정은, 미정은... 모든 어미가 그러하듯 강인하게

조건 없이 안아주었고 사랑해주었고 아껴주었고 지켜주었다.

마치 받는 여자처럼, 그게 어떤 상황이든 조건이든 상관없이 무한의 사랑으로.

비록 인간이지만 신과 같은 큰 사랑으로 그를 추앙하였다.

 

따지고 보면,

식구들은 이름 없는 구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한 밥상에 앉혀 함께 먹었다.

한마디로 그의 이름이 아닌 존재로 받아준 거다.

그러나 구씨는 스스로 이름을 감춤으로써 객으로 밥상에 앉아 있었다.

구씨는 몰랐겠지만 하루 두세 번 함께 먹는 식사는 무슨 의식과 같이 

그의 지친 몸과 마음 영혼을 치유했으리라.

 

몰랐을 거다.

그저 시간이 흐르니까 조금씩 낫는 거고 잊히는 거고 버티고 서는 거라 생각했을 거다.

혼자서 서서 있는 거라 믿었을테다.

마치 미정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그래서

그들을 지킨다고 착각하며 산포를 떠났을 거다.

 

실은 그들이 자신을 지켜준 것임을, 살려준 것임을 까맣게 몰랐을 거다.

미정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둘이 전생에 쌍둥이었나, 라던 곽혜숙 여사의 말처럼 아버지와 구씨는 착각도 같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다시 찾은 산포에서 어머니의 죽음 앞에,

아버지의 병환과 재혼 앞에,

산포를 떠나 서울로 간 삼 남매 앞에,

사뭇 변해버린 마당과 공장 앞에,

텅 빈 자식들의 방, 거실 한편 쌓인 호박, 사라진 삼 남매의 사진 앞에서

구씨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오만을 적나라하게 보았다.

'내가' 한다는 호언장담이 얼마나 가소로운 것인지.

 

존재는 그저 모든 사람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주고받을때 생명력이 있는 것 뿐임을.

 

이름도 없이 그저 그렇게 지내다 떠나가면 그만인..

그래서 그리울 때 꺼내보는 사진처럼

잠시 추억하듯 꺼내보면 그만인 그런 관계들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마저도 너무 그리워 죽을 것 같으면서도...)

 

더 늦기 전에.

 

'구자경' 온전한 석자 이름을 갖고 객이 아닌 존재로,

떳떳하게 부대끼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해방'도 '구원'도 있음을 구씨는 댓가를 치뤄 배웠기에.

 

'구.자.경'

이제 그의 해방일지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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